이름이 너무 커서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20세기 독일의 대표 극작가이자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보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나치를 피해 15년간 긴 망명 생활을 한 것 외에도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 외에도 다른 여성들의 이름이 많았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그의 자식을 낳은 이도 있고, 오랜 시간 그의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망명 생활과 창작 활동을 함께 한 애인도 있습니다.

독문학자 전영애 선생님도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치열한 이론과 실천”을 존중하고, 수많은 망명지를 떠돌면서도 꺾이지 않은 이념과 예술이라는 본업에 몰두한 점을 역시 매우 존중하지만, “어쩐지 석연찮은 구석”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극우 집권의 조짐이 보인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있자 바로 그 다음날로 독일을 떠났고, 매카시즘의 선풍이 인 미국에서 반미책동의 혐의를 받아 청문회에 출석하게 되자,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여 모면하고―각별한 동료 한스 아이슬러는 감옥으로 갔다―그 다음날로 유럽으로 날아가는 그의 대단한 기민성은 시대상과 맞물려 있는 줄 알면서도 어쩐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연극을 위해서, 또 자신을 위해서 주변에 사람들을 모으고 또 가차 없이 이용할 줄도 알았던 그의 대단한 능력도 꼭 바람직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젊어서부터 동시에 여기저기에 둔 여성들, 자식들 역시 그렇다. “우선은 처먹기, 도덕은 그다음”이라는 그의 대담하고 신선한 모토 또한, 그의 삶에는 꼭 생계 수준의 선이 아닌,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사치도 포함되어 있어서 그 역시 석연치만은 않다.

― 전영애, 『시인의 집』에서

 

브레히트의 망명 여정을 보면 가히 도망의 명수라고 할 만합니다. 그가 거친 망명지를 대략적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33년: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스위스 취리히, 프랑스 파리

1933-1939년: 덴마크 퓌넨 스벤보르

1939년: 스웨덴 스톡홀름

1940년: 핀란드 헬싱키

1941년: 소련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1941-1947년: 미국 산타 모니카

1947년: 프랑스 파리, 스위스 취리히

1948년: 동독 동베를린으로 귀환.

 

 

Brecht brought before the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in 1947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 질문을 듣고 있는 브레히트 (1947년 10월 30일)

 

 

특히 미국을 떠날 때는 어쩐지 동물적 감각까지 느껴집니다. 매카시즘의 광풍에 의해 국회에 설치된 반미활동조사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서 브레히트는 ‘요주의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심문을 받게 되는데, 통역을 마다하고 직접 서툰 영어로 응합니다. 그리고 청문회 후 곧장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향합니다.

 

“저는 히틀러에게 맞서 투쟁하자는 여러 노래나 시, 드라마를 썼습니다. 그야 물론 혁명적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사실 저는 그런 정부를 쓰러트리자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I have written a number of poems, songs, and plays, in the fight against Hitler, and, of course, they can be considered, therefore, as revolutionary, cause, I, of course, was for the overthrow, of that government.)

(…) 곤란한 질문이 나오면 브레히트는 번역상의 문제로 돌리며 피해 갔다. 끝내 결정적인 질문이 떨어진다. “당신은 공산당 당원입니까?” 이 질문에 브레히트는 “아니요!”를 네 번이나(“No! No! No! No!”) 내뱉는다. 실제로 브레히트는 당원으로 등록한 적은 없었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이재진 옮김, 『코리올란』의 해설에서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전후로 망명하여 떠돌게 된 독일의 지식인, 예술가 중 무사히 목숨을 부지하여, 다시 독일로 돌아온 이는 떠난 수에 비해 적었고, 그 중 망명 기간 동안 브레히트처럼 많은 작품을 남긴 이는 더욱 드뭅니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기회주의적으로, 혹은 도덕을 내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상황 판단이 빠르지 않았다면 인간으로서, 또 예술가로서 생존이 불가능했겠지요.

 

 

 

Brecht and Benjamin playing chess while exiled in Denmark, 1934

덴마크 망명지에서 발터 벤야민(오른쪽)과 함께 체스를 두고 있는 베르톨트 브레히트.(1934년) 벤야민은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스페인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스페인과 인접한 프랑스의 국경지대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브레히트와 함께 ‘베를린 앙상블’을 이끌었던 부인 헬레네 바이겔 외에도, 그의 여러 연인들 중 가장 유명한 세 여성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마르가레테 슈테핀 그리고 루트 베를라우는 또한 명실상부한 공동 작업자이기도 하였습니다. 브레히트는 항상 누구와 공동 작업을 했는지 작품에 꼭 적었고, 그들의 업적을 공공연히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의 사랑과 열정이 없었다면 또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브레히트의 작품은 몇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좀 더 나아가면, 어쩌면 브레히트라는 이름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의 ‘변명’도 함께 소개하는 것이 공평할 것 같습니다. 망명 시절의 대표적인 시집 『스벤보르 시집』에 수록되었던 「후손들에게」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잠겼던 물결 위로

다시 솟구칠 그대여,

우리의 약점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거든

이 어두운 시대를

생각해 다오,

비록 그대들이 피해 간 것이긴 하지만.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며 우리는,

계급 간의 전쟁을 뚫으며 우리는 지나갔다,

불의만 있고, 항거가 없을 때 절망하며.

 

우리는 알고 있거늘

저열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 아, 우리는

친절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 했던 우리는

스스로가 친절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조력자가 되는 그런

시대가 오거든, 그대여

생각해 다오

우리를 관대한 눈으로 말이오.

 

― 베르톨트 브레히트, 「후손들에게」,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것들을 감수해야만 했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인간적인 시대를 위해 힘썼지만 그 길이 항상 인간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보다는 나은 시대에 후손들이 살고 있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이런 자신에 대한 회한이 뒤섞여 부디 자신의 세대를 ‘관대한 눈으로’ 생각해 달라는 말을 합니다. 감히 연민을 느끼지 않기 어렵습니다.

 

민음사 세계시인선 33번으로 출간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두 번째 시 선집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 위 시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문학의 사용 가치를 강조한 참여 문학의 기수이자 뛰어난 예술적 혁신을 통해 20세기 독일 문학의 새로운 얼굴이 되었던 시인 브레히트의 대표 시들이 엄선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939년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직접 「후손들에게」를 읽는 음성입니다. 혹자는 이에 대해 당시 망명지를 떠돌던, 갓 불혹을 넘긴 브레히트가 유언을 남기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https://youtu.be/m2rCM09ougk

 

인문교양팀 이한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