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처음 들어와서 놀란 것은 내가 이력서에 쓴 능력만이 활용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외국어 시험을 치르는 데 쓰는 능력은 외국어 능력과 다르고 직장에서 쓰이는 능력과도 차이가 있다. 나는 독일어 중간 시험 점수를 제출했었는데, 출판사에서 독일어를 쓴다는 건 빼곡한 몇백 페이지짜리 독일어 원서를 읽고 번역 출간을 할지 검토하는 일이었다. 책을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 판단하고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일에 내 성격, 관심사, 독서 이력, 지향 같은 게 전부 반영되는 데는 아찔한 구석이 있다.

편집자로 일하려면 언어 능력이 필요하다. 원고의 맞춤법 띄어쓰기를 보는 교정과 내용을 확인하고 문장을 정리하는 교열부터 쉽지 않은데, 책을 편집하는 일에는 이뿐 아니라 문단에 소제목 붙이기, 한 권을 관통하는 메시지 찾기, 도서 소개 글 쓰기 등 국어 시간에 배운 것들이 총체적으로 쓰인다. 결정적으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책 팔기는 살면서 배운 적이 없다. 회사원이 되고서야 엄마가 30년이 넘게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엄마는 몇 번의 월요병을 겪은 것인가! 그리고 30여 년 동안 한 직업에 있으면서 얼마나 능력자가 된 것인가? 텔레비전에 나온 이발의 달인이 최소 30년은 경력이 되어야 가위 잡을 줄 안다고 하던데, 선생님인 엄마는 진짜로 이제야 아이들을 대하는 법을 알 것 같다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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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의 성장』을 투고 원고로 받았을 때 가장 관심이 갔던 건 저자가 국립박물관에서 34년을 일했다는 사실이었다.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는 출판사에서 편집자처럼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이 ‘알아보는 일’에 관해서 미학자나 예술학자가 쓴 책이 많지만, 전국의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전시를 기획한 프로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원고에서 특히 좋았던 부분은 저자에게도 햇병아리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물관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유물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끼지 못해서 괴로웠고, “참으로 긴 시간이 흐른 어느 때부터인가” 비로소 안목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 이 원고를 책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어려운 일인 책 제목 짓기도 이때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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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내옥 선생님은 진주·청주·부여·대구·춘천의 국립박물관장과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아시아부장을 지내고 지금은 은퇴해서 시골 ‘한칸집’에 살고 있다. 부여박물관에서의 백제 유물 전시와 도록, 관조 스님의 꽃살문 사진전 등 전설적인 기획 이야기는 책에 모두 나오지만, 출간 준비로 만나 뵈면서 다 못 쓴 이야기들도 들었다. “일이란 본시 모사는 쉬우나 성사가 어려운 법”이라는 본문 표현처럼 일을 이루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루지 못한 일은 얼마나 안타까운지 하는 뒷이야기들이었다. 원고 안팎에서 배운 건 무엇보다 선생님이 직업 현장에서 다한 정성이다. 맡은 일을 성실히 하고, 해 보지 않은 일을 새로 하기가 어렵다는 걸 갈수록 알게 되는데, 몇십 년 동안 선생님은 그렇게 일하면서 모르는 걸 배우고 좋은 사람들에게 배우면서 안목을 키운 것 같았다.

며칠 전에 역사학자인 정청주 전 전남대 명예교수님이 감상을 보내오셨다. “시종일관 감동 속에서 재미있게 읽었다. 감동이란 그 내용이 내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을 읽는 동안 슬픈 감정이 내내 함께했다. 사실 슬프다는 것이 무상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가장 큰 본질이 아닌가 한다. 그만큼 저자가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냈다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장’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 감상에서 말하듯 ‘무상한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는 책의 바탕에 흐르고 있다. 퇴직을 준비하고 있는 엄마는 이제 『논어』보다 『장자』가 더 와닿는다고 하는데, 무상함이란 일에서 물러날 때 다가오는 것인가 짐작해 본다. 나도 30년이 지나면 무상함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될까? 그러면서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런 궁금함이 남는다.

 

민음사 편집부 신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