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피천득 선생님은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남들이 다 마시는 술, 나도 한번 먹어 보자 싶어 호연한 걸음으로 카페에 들어가 와인 한 잔을 시켰다고 해요. 승부도 그런 승부가 없었습니다. 와인 잔이 뚫어질듯 한참을 들여다보던 선생님은 끝내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항복해 버렸어요. 결국 입에도 못 댄 술값을 치르고 나오려는데 종업원이 쫓아 나오며 왜 술을 안 마시지 않고 그냥 가느냐고 묻지 않았겠어요? 머쓱해진 선생님은 그저 술 빛이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둘러대고는 총총, 술집을 나왔다는 이야기.

 

 

인연_입체북창밖은오월인데_입체북

 

 

 

이토록 낭만적이고 소박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작가는 피천득 선생님밖에 없을 겁니다. 휘게니 라곰이니 오캄이니, 소확행의 시작을 먼 나라에서 찾는 이들도 많지만 그럴 거 있나요? 잠에서 깨면 보려고 장미꽃 일곱 송이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저런 이유로 꽃을 다 나누어 주고 정작 빈손으로 돌아온 이야기, 주말에 딸아이와 아이스크림 사 먹고 데서 인생 최고의 행복을 느꼈던 만족들이야말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순간들일 텐데요. 『인연』은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 그 모든 조그마한 행복들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싱그러운지 보여 주는 기분 좋은 산책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해가 가는 순간 선생님의 노트에 적힌 ‘내년에 꼭 할 일’ 목록을 떠올리면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눈 오는 날, 비 오는 날, 돌아다니기 위하여 털신을 사겠다. 금년에 가려다가 못 간 설악산도 가고, 서귀포도 가고, 내장사 단풍도 꼭 보러 가겠다. 이웃에 사는 명호를 데려다가 구슬치기를 하겠다.” 그래서일까요. 선생님은 노년이 더 아름다웠던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기쁨과 슬픔을 많이 겪은 뒤에 맑고 침착한 눈으로 인생을 관조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여기에 회상이니 추억이니 하는 것을 계산에 넣으면 늙음도 괜찮다. 그리고 오래오래 살면서 신문에서 가지가지의 신기하고 해괴한 일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선생님은 오래오래 사셨습니다. 1910년부터  2007년까지, 97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야말로 20세기를 오롯하게 살아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맑고 침착한 생활이 흐트러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피천득 선생님의 노년을 보고 저렇게만 늙을 수 있다면 나도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 있죠.

 

 

피천득_프로필사진(흑백)

 

 

 

“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  우리에게 동심을 자극하는 시구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가지가지 신기하고 해괴한 일을 보고 싶어 하던 선생님의 꽃받침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했던 선생님의 사진에는 종종 찻잔이 함께합니다. 꽃과 차를 보는 것처럼 밝고 맑은 마음으로  『인연』을 읽어 봅니다. 그리고 『창밖은 오월인데』도. 읽고 있자니 오월은 지나갔지만 마음속에 늘 오월을 품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깁니다.

 

민음사 편집부 박혜진 (문학2팀)

출간일 2018년 5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