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의시245_작가의사랑_입체북

문정희 신작 시집 『작가의 사랑』 중에 가장 충격적인 시편은 아무래도 시집 종반에 자리한 「곡시」가 아닐까 싶다. 「곡시」는 우리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 소설가이자 능력 있는 번역자이며 시집을 상재한 시인이기도 한 김명순의 비극적 삶을 노래한다. 아니 노래한다기보다 울며 통곡한다. 김명순의 후예 문정희는 부드러운 위로가 아닌 사나운 일갈을 택한다.

문정희는 참전하지도 않은 싸움에 패배자로 몰려, 역사의 후미진 곳으로 물러나야 했던 여성들을 호명한다. 페미나상을 제정한 프랑스의 시인 안나 드와이유, 이탈리아의 여성 기자 오리아나 팔리치, 세기의 콜렉터 페기 구겐하임, 멕시코 전설 속 여인 요로나, 이땅의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까지. 그중 ‘김명순’은 『작가의 사랑』 전면에 걸쳐 행해진 ‘이름 부르기’ 작업의 최절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정희의 호명은 「곡시」에서는 조금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지워지고 배제된 여성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여성을 지우고, 배제했으며, 우연히 달고(?) 나온 것을 바탕으로 한 권력에 취해 폭력을 휘둘렀던 남성들을 호명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데이트 성폭력을 저지른 이응준, 이를 두고 연재하는 소설을 통해 2차 가해를 자행한 김동인, 펜으로 김명순을 능멸하고 따돌리는 데 함께했던 염상섭, 김기진, 전영택, 방정환…… 지금도 문학 교과서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남성들의 이름 세 글자를 문정희는 「곡시」를 통해 또박또박 부른다. 그리고 그들더러 들으란 듯이, 그들의 후예더러 더 움찔대라는 듯이, 절규한다.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2018년 우리는 여전히 부끄럽고 사나운 땅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한창이다. 고통과 상처를 받았고, 자신의 잘못인 양 세상에서 지워졌던 이들이, 그들 가해자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문정희 시인은 미투 운동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여성의 생명을 짓밟아 온 천년 빙설이 깨지는 소리입니다. 한국의 딸들이 깨어난 것이죠.” 과연 얼음의 땅에 봄이 올까? 결과가 어찌되든 그 시작에 『작가의 사랑』과「곡시」를 소리 내어 읽는 그들이 있을 것이다.

 민음사 문학2팀 서효인

문정희
출간일 2018년 3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