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기행』 죽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여행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가면 엄마 아빠 동생과 돗자리를 깔아 놓고 절하고 놀다가 온다. 묘비에 ‘서암거사’라고 쓰여 있다고 우리 할아버지 서암거사시라고 엄마랑 항상 웃는다. 할머니 자리에는 ‘홍해일정’이라 해서 넓은 바다에 단 하나의 정한 사람이라 했다고, 할아버지 표현 크으으 하면서. 묘비의 글은 할아버지가 생전에 적어 둔 것이다.

 

캡처

 

자기 묘비에 쓸 글을 고르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릴케의 묘비에 쓰여 있는 “장미, 아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까풀 아래, 어느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는 릴케가 손수 고른 시다. 예이츠 역시 만년의 시를 택해 비석에 적었다. “삶에, 죽음에/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말 탄 이여, 지나가라.” 묘비를 읽으면 한순간 그 시, 사람, 죽음, 삶 같은 것에 대한 분명치 못한 생각들이 마음속에 지나간다.

 

동양에서는 이렇게 묘비에 새길 글을 스스로 써 둔 걸 자찬묘비(自撰墓碑)라고 한다. 자찬묘비의 전통은 오래되었으니 거슬러 올라가 도연명이 스스로의 죽음을 애도한 시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무엇이 한스러운가, 술 마신 것이 흡족하지 못했음이라네.(但恨在世時, 飮酒不得足.)” 동양의 현자들이 달관했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러한 말을 보고 그 사람이 죽음의 문제에 초연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서 『내면기행』은 시작된다. 이끼 낀 비석을 더듬어 읽으면서 옛날에 죽은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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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사진을 보면 예이츠 비석의 “Cast a cold Eye”는 읽지만 왼쪽 위처럼 전서체로 된 미수 허목의 비석은 읽기 어렵다. 이때 심경호 교수가 자상하게 안내해 준다. 한문학의 연구와 번역 양면에서 정평이 있는 저자는 자찬묘비를 번역하고, 인물 사적의 문헌 고증을 거쳐 그 사람의 내면을 탐색한다. 한국 최초의 자찬묘비를 남긴 고려의 김훤에서 구한말 먼 만주 땅에 묻힌 지식인 이건승까지 58인의 묘비명을 시대순으로 놓았다. 따라가면서 읽으면 우리에게 가까우면서도 먼 고려 사람 김훤이 “바탕 삼은 것을 따져 보면/ 하나의 어리석은 몸뚱이/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필경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자문하는 데서 놀라고, 86세의 허목이 “요란하게 성현의 글을 읽기만 좋아했지/ 허물을 하나도 보완하지 못했기에/ 돌에 새겨 뒷사람들을 경계하노라.” 한 데서 벼락같이 뜨끔한다. 이황은 자명(自銘)에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라 썼다. 이건승은 “마침내 늙어 바라지 밑에서 죽으니, 아! 슬퍼라!”라 남겼다. 그 사람의 삶을 생각하게 되고 그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민음사에서 『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논어』를 선보인 뒤 5년 만에 나오는 심경호 선생님의 책이다. 선생님 책을 읽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원고를 읽고, 좋으신 선생님을 뵙고 하는 건 일하는 시름 가운데에서도 늘 즐거움이면서 보람이다. 선생님 스스로 주저로 꼽는 이 책 『내면기행』은 영어, 독일어, 중국어로 해외 번역 출간을 앞두고 전면 개정되었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만이 아니라 서문의 표현대로 “나 자신의 삶과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새로 편집하면서 판형은 너무 크지 않게, 글씨는 시원하게 하는 등 중년의 미술부 부장님과 디자인에도 힘써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랐다.

 

민음사 편집부 신새벽

심경호
출간일 2018년 3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