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한 척할래』 두 아웃사이더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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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 이름에 대해서도, 주변 사람들의 이름, 혹은 유명인의 이름, 인상 깊었던 소설 속의 인물의 이름에 대해서도. 본명이랄지 실명은 재미가 없다. 그 이름은 대부분 평범한 데다, 이름의 주인이 아니라 이름을 지은 사람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기도, 그 시대의 유행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저 너와 나를 구분하기 위한 사회적 용도일 뿐이다.

소설 속 인물의 이름은 그나마 흥미로운 편이다. 좀 더 신선하기도 하고, 모호하기도 하다. 최근 우연히 읽은 소설 속 등장인물 이름은 ‘복도’였다. ‘통로’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일본어로 ‘후쿠시마’를 뜻하는 것이라 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꼭 실명으로 지칭되는 것만은 아니라서, 때로는 별명으로, 때로는 대명사로, 때로는 알파벳으로 불려도 아무 문제 없기도 하다.

『태연한 척할래』의 두 주인공의 이름은 알렉산드라와 가브리엘레이다. 다섯 음절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이름. 둘 다 흔한 이름이다. 고백하건대, 편집하는 내내 저 이름은 입에 붙지 않았고 눈에도 설었다. 내게 두 주인공의 이름은 오히려 제로와 제타로 기억되었다. 제로와 제타, 그리고 이들이 사는 제로랜드로…….

먼저 제로(Zero), 제로는 가브리엘레의 별명이다. 반 친구들이 아웃사이더에 문제아인 그를 부르는 이름. 그는 무리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으며, 그가 앉는 자리 주변엔 그 누구도 앉지 않는다. 제로라는 이름은 무(無)라서, 아무리 존재하려고 노력해도 지워지기만 한다.

한편 알레산드라의 별명 제타(Zeta)는 이탈리아어 자모에서 스물한 번째이자 최후 문자인 Z를 뜻한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좌절감에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선택한 알레산드라가 제로의 옆자리에 앉기 시작하자, 반 아이들이 제로와 좋은 짝이 되었다며 놀리느라 만든 별명이다. 맨 뒤에 겨우 존재하는 제타가 되어 버린 알레산드라는 자신이 어떻게 불리는지 따위엔 신경 쓰지 않는다.

 

제로와 제타, 극단적인 커플이다. 보이지 않는 남자와 그림자 여자, 두 명의 짝.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본문 중에서

 

알레산드라는 가브리엘레에 대해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우연히 자신이 침범한 맨 뒷자리, 제로만의 영역, 그의 곁에 감도는 차갑고 공허한 분위기에 그곳을 ‘제로랜드’라고 이름 붙인다.

 

제로는 평범한 애가 아니다. 그에게는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는데 어떤 날 보면 완전히 다른 행성,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이 금지된 제로랜드의 외계인 같다.―본문 중에서

 

알레산드라는 엄마를 잃은 상실감을 점점 가브리엘레라는 자신과 똑같은 눈빛을 한 소년에게 위로받는다.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가브리엘레와 함께 있으면 ‘제로랜드’라는 완전히 다른 행성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심장이 어찌나 요란하게 뛰던지 심장이 두 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행성에 살아서 산소를 받아들이는 양이 각기 다른 심장에 익숙해져야 하는 기분이다. 가브리엘레와 있을 때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다른 행성에, 다른 곳에 있는 것인지도. (…) 우리는 제로랜드에 있다.―본문 중에서

 

그러므로 ‘제로랜드에 있다.’라는 표현은 작가가 만들어 낸 ‘너와 내가 사랑하고 있다.’라는 뜻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종종 자신들이 지구와 다른 중력의 무게를 받으며 둘만의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느끼는데, 그 느낌을 드러내는 낯설고도 새로운 표현이다.

 

제로랜드는 내가 몸을 숨겼던 공간이야.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고 영원히 그러리라는 걸 알려야 했을 때 내가 상륙했던 곳이야. 거기 네가 있었어. 넌 텅 빈 왕국의 왕이었지. 제로랜드가 그립지 않니?―본문 중에서

 

알레산드라의 독백처럼 제로와 제타는 상처받기 쉬운 십 대의 힘겨웠던 한 시기를 함께 말없이 버텨 왔다. 소설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 미리 말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애절하지도 강렬하지 않다. 굳이 말하면 ‘위안’이랄까. 겨울 내내 짙었던 안개가 어느 순간 흩어져 새싹을 촉촉하게 하는 단비가 되듯, 마땅한 시기가 지나자 몽글몽글했던 감정은 어느새 삶을 재건할 에너지로 바뀐다. 제로와 제타에 걸맞은 사랑의 종말이다. 이들은 힘들 때마다 제로랜드를 가끔씩, 그렇지만 오래오래 떠올릴 것이다.

 

민음사 편집부 허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