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는 책을 열심히 읽던 시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안에는 내가 원하는 지식이 다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않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얻었다. 다만 책이 아니라 콤팩트디스크(CD)였다. 그 많은 책이 CD 한 장에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02년에 나온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5판. 우리는 이 많은 책이 CD 한 장에 들어가는 세상을 살고 있다. Ⓒ SEWilco)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막상 손에 넣고 보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훌륭하기는 했으되, 뭔가 아쉬웠다. 몇 번 보고는 더는 찾지 않았다. 그 후 이상하게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처음에는 스마트폰에 설치하는 애플리케이션으로 나왔다. 나중에는 온라인으로도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종이책의 형태로 나오지 않는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자랑을 하고 싶어진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아는 것이 쌓이면 분류를 하고 정리도 해야 하는 법이다. 피터 버크는 그동안 르네상스, 대중문화, 사회학, 예술사, 문화사 등에 관해 책을 썼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다 보니 그동안 쌓아 놓은 지식이 많았던 모양이다. 마침내 피터 버크는 지식의 역사를 쓰겠다는 과업에 도전했다. 그리고 『지식의 사회사』라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덕분에 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맞이한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425년에 설립된 루뱅 대학은 1639년에도 여전히 도서관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교수들이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1805년에 출판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증보판의 편집자 제임스 타이틀러의 전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주인공을 떠나보낸다. “그 재능이 아무리 놀랄 만하더라도, 또 아무리 치열하게 전념하더라도, 누구도 자기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 될 수 있다고는 온전한 정신으로 생각할 수 없다.” 1639년과 1805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식은 점점 늘어난다. 드니 디드로가 1751년에 첫 번째 권을 펴낸 『백과전서』의 필진은 약 140명이다. 모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1881년이 되면 헨리 머리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집에 나서는데, 750명이 넘는 자원자의 도움을 받았다. 1911년에 나온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의 필진은 1507명인데, 이조차도 수십만 명의 독자가 만드는 ‘위키백과’ 앞에서는 초라해진다.

찰스 1세와 카를 5세

(영국 왕 찰스 1세(왼쪽)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오른쪽).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카를 5세가 더 크지만, 영국에서 만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찰스 1세에게 더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지식은 사라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헨리 머리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빼놓은 단어가 없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도 결국 ‘여자 노예(bondmaid)’처럼 빠진 단어가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에서는 찰스 1세가 열세 단, 카를 5세가 열한 단을 차지한다. 그런데 1974년에 나온 『신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 두 항목에 각각 다섯 단만을 할애했다. 지식이 너무 늘어나서 기존 항목의 양을 줄여야 했던 것이다.

지식이 지금처럼 가까이 다가온 것은 언제부터일까? ‘신지식인’ 1호가 탄생했던 때일 수도 있고, ‘지식검색’ 서비스가 시작된 때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지식iN’을 통해 모두가 지식인이 된 때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넘쳐 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진부한 말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지식의 사회사』를 통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내가 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깊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둔 시대에 한 번쯤은 음미해 볼 만한 문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