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그토록 많은 거짓으로 뒤덮여 있지 않다면, 나는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D. H. 로렌스

corbis - sacchi - Couple As They Sailed For Europe1_로렌스

 

대학원 입학시험을 붙었다고 탱자탱자 놀고 있을 때, 논문 제출 안 하면 졸업 안 시켜 준다는 조교 언니의 최후통첩 전화를 받고 놀라 대충 써낸 페이퍼가 D. H. 로렌스에 대한 글이다. 너무 부끄러워서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영문학과에서 그렇게 로렌스와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20대 때는, 그저 가식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던 로렌스가 참 좋았다.

085_채털리부인의연인1-500x852059_아들과-연인1-500x844135_무지개-1-500x852
민음사에서 30대를 시작할 때, 로렌스의 자전적 소설 『아들과 연인』을 편집하게 되었다. 문학팀 편집자 시절에는 좋아하는 작가가 많아지면서 로렌스는 내 마음속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었고, 로렌스에 매혹되었던 어린 시절은 좀 단순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강산이 한 번 바뀌었는데, 이번에는 로렌스의 시집 『나의 사랑은 오늘 밤 소녀 같다』의 출간했다.

DufMF2r
뭐든 빠르게 진행되면 그 부작용이 이게 마련인데, 20세기 초 영국 도시 빈곤층이 바로 급속한 산업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소외계층이었다. 반대편에는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지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 내용과 형식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독일어 ‘-burg’는 ‘평지 위에 세워진 도시’를 뜻하는 접미사인데, 여기서 ‘부르주아’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즉 ‘성곽 안에서 안전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1_프리다와 로렌스 de86244
부르주아지가 귀족계급을 대체해 나가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의식은 가식으로 충만해져만 갔고, 이렇게 안이한 부르주아적 의식에 구역질을 나는 예민한 예술가이면서 도시 빈민과는 또 다른 계층이었던 지식인 D. H. 로렌스는 자신의 고단한 삶과 정신을 문학으로 승화해야만 했다.
그리고 거짓된 동정심으로 가득 차
일 마일을 걷는 자는 전 인류의 장례식장으로 가느니.―D. H. 로렌스, 「휘트먼에게 주는 대답」, 『나의 사랑은 오늘 밤 소녀 같다』에서

그래서 40대에 접하는 로렌스의 시는 마음을 짠하게 한다. 기교적인 세련됨을 단련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그의 정신은 분주했던 것 같다. 빅토르 위고처럼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안에 있었던 대저자와 스케일은 다르겠지만, 로렌스는 20세기 영국 사회에서 꼭 필요한 목소리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21세기 독자의 감수성에 더 많은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전이 그렇듯, 당시 유럽에서 중요한 소설이었던 만큼 지금 이 시대에도 유의미한 질문들을 던지는 작가다. 부르주아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허위의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있고 우리 모두가 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곧 후회스러웠다
얼마나 무가치하고 야비하고 비열한 짓인가!
나를 경멸하고, 저주스런 인간 교육의 목소리를 멸시하였다.나는 알바트로스를 생각했다.
그리고 내 뱀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다.

내게는 그가 왕처럼 보였기에,
추방당한 왕, 지하에서 왕관을 쓰지 못했으나
곧 다시 왕관을 쓸 왕처럼.

이리하여 나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생명의 왕과의 기회를,
나는 이제 속죄해야 하느니,
나의 비루한 짓을.

―D. H. 로렌스, 「뱀」, 『나의 사랑은 오늘 밤 소녀 같다』에서

 

 

양희정 (인문교양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