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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마인드’ ‘굿 윌 헌팅’ ‘세 얼간이’ ‘파인딩 포레스터’ ‘21’……. 포털 검색창에 ‘천재가 나오는 영화’를 검색해 본 사람이라면, 서로 뭔가 통하는 것이 있을 것 같다.
두꺼운 안경을 낀 라이벌이 칠판에 아름다운 수식을 내려 갈길 때, ‘왜 저런 수고를 하지?’ 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로 답을 적는 천재를 바라보는 쾌감이란! 수식을 생략한 연산, 과정을 비약한 성공, 나는 완벽한 경탄의 대상이 필요할 때 ‘천재 스토리’를 찾았다.

그리고 드디어 입사 1년 만에 천재가 나오는 소설을 담당하게 되었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할리우드 유명 배우가 영화화를 앞두고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체스’라니. 바둑의 신 커제가 엊그저께 알파고에 완파당한 마당에 체스라니. 체스는 ‘베리에이션’이라고 불리는 ‘경우의 수’가 바둑보다 적기 때문에 이미 1997년 IBM의 체스용 컴퓨터가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완전히 꺾지 않았던가.

이 책의 원제는 뤼네부르크 베리에이션(La variante di Lüneburg). 뤼네부르크는 소설 속에서 사건의 발단이 되는 베르겐 벨젠 수용소가 있는 곳이자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가 실제 수용되었던 홀로코스트의 현장이다. 이 지명에서 이름을 딴 ‘뤼네부르크 베리에이션’은 주인공인 유대인 천재가 고안한 체스 디펜스 방법으로, 예측할 수 없는 수를 두며 과감한 플레이를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호전적이고 직관적인 도발로 가득 찬 ‘유대인 체스’의 정수라고나 할까.
한편 주인공에게는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독일인 라이벌이 있다. 평소 귀족 출신답게 절제된 몸가짐과 한 수를 두기 위해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연산하는 습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이성 중심의 ‘아리안 체스’ 신봉자이다. 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아리안 체스에 비해 뤼네부르크 베리에이션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의 근본 없는 체스인지 증명하려 한다.

베르겐 벨젠 수용소에서 만난 두 천재. 그들의 이야기는 다분히 ‘아름다운 수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인간보다 인공 지능이 빠르고 정확하게 ‘정답’을 외치는 시대, 어쩌면 철저히 실패한 기보에 관한 이야기다. 비극적인 운명과 유한한 능력에 맞닥뜨린 인간이 그 필연적인 한계 안에서 어떻게 최선의 수를 도출하는가에 관한 기록.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체스의 신비가 정복된 지 30년,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모든 ‘천재 스토리’ 중 가장 최신작이라고 생각한다.

『폰의 체스』로 서명을 바꿨다. ‘폰’이란 장기의 졸과 같이 체스보드 위의 가장 약한 말이다. 베르겐 벨젠 수용소 안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인 유대인 주인공을 비유한 것이면서, 반전에 관한 중요한 암시이기도 하다. 모두가 잠든 수용소의 밤, 나약한 폰 하나가 역사에서 사라질 승부를 위해 정방형의 지옥으로 뛰어든다. 체.알.못도 이해하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으로!

 

체스보드(흑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