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들에게 파랑은 야만(북방 민족)과 죽음의 색깔이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한 장면.
「수태 고지」, 프라안젤리코, 15세기. 파랑은 중세에 이르러 성모 마리아와 왕실을 의미하는 색으로 격상되었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색을 꼽으라고 하면, 거의 틀림없이 파란색을 이야기하곤 한다.(물론 검정이나 빨강, 하양 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파랑을 가장 좋아한다고, 서슴없이 외친 사람들에게 “왜 하필 파란색을 좋아하나요?”라고 물으면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에 별난 이유가 있겠느냐고, 우문현답을 하는 분들도 계실 테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파란색의 ‘청량하고 자유로우며 산뜻하고 경쾌한 분위기’에 끌렸다고, 약간은 추상적이지만 충분히 납득할 만한 근거를 들려주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파랑은 정말로 ‘그런’ 색일까?
우리가 기초 교육 과정에서 배웠던 ‘언어의 자의성’을 떠올려 보면, 사실은 색채에도 특별한 의미가 깃들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생뚱맞지만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볼 수 있으리라. 지구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 수만 가지 색채에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특정한 감정에 취하곤 하는데, 어쩌면 이 모든 게 인간과 그들 자신이 이룬 사회와 역사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파랑이 정말로 평화와 자유를 의미할까?(국제 연합의 깃발을 떠올려 보라.) 또 파란색은 정말로 바다나 천공의 색깔인 걸까?(사람들에게 크레파스를 건네며 바다와 하늘을 그려 보라고 하라.)
『파랑의 역사』는 파란색을 좋아해서 책을 집어 들었을 많은 독자들에게 다소 흥미로운, 더불어 상당히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란색을 비롯해 모든 색깔에는 사실 아무런 뜻도 없으며, 그 색이 자아낸다고 여겨지는 ‘의미’는 결국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사족이지만, 인류가 하늘과 바다를 파랑으로 인식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이럴 수가.)
19세기 무렵, 붉은색은 러시아 혁명과 노동자 계급, 마르크시즘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영국 보수 정당을 대표하는 마거릿 대처는 푸른색 옷을 즐겨 입었다.
고대 로마 때까지만 해도 파란색은 야만인의 색으로서, 문명을 이루지 못한 북방 야만족들(로마의 입장에서 말이다.)이 전투에 임하거나 힘을 과시할 때 몸을 치장하는 공포와 미개의 색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은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저 유명한 장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애초에 파랑색을 선호하지 않았던 로마인들은 파랑을 가리키는 적확한 단어조차 만들어 내지 않았다. 물론 파랑이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로마인들에게 그 색은 부패한 시체(죽음)의 색깔이자 문명을 파괴하는 북방 민족의 포효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로마가 멸망하고, 파란색은 유럽의 패권을 쥔 새로운 민족들의 성향을 반영하게 되었다. 즉 왕족과 성모의 색깔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색은 인간과 사회의 요구에 따라 그 의미를 뒤바꿔 왔다. 머나먼 타국, 수천 년 전의 예를 찾을 필요도 없이, 색이 지닌 의미의 변전은 우리 곁에서도 수시로 일어난다. 예컨대 대한민국 정당의 기조색(基調色)을 생각해 보라. 좌우, 보수와 진보를 표방하는 각각의 정당들이 파랑과 빨강, 초록과 노랑 등의 색깔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말이다. 마거릿 대처의 슈트 색으로 대변되는 보수 진영의 색채, 즉 파랑이 어떻게 변화했고 ‘노동자 혁명’의 정신을 대표하는 붉은색이 현재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성별에 따라 색깔을 나누곤 했다. 여자아이에게는 분홍이 어울리고 남자아이라면 으레 파랑을 좋아해야 한다는 식으로, 성차별적인 문화적 압력을 가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색채엔 성별이 없다는 인식이 분명히 밝혀지면서, 성별에 따라 특정한 색을 대응시키는 세태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가 하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은 파랑’도 존재한다. 가령 번민하는 젊은이를 표현할 때 파란색이 곧잘 인용되곤 한다. 이러한 파랑의 원형을 이룬 작품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작품 속에서 걸쳤던 파랑색 옷은 「미녀와 야수」의 왕자(야수), 「라라 랜드」의 미아에게도 입혀졌다.(다소 과한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한편 노동복으로서 개발된 청바지, 즉 파란색 진(jean)은 영원한 젊음의 아이콘 제임스 딘과 1968년 혁명, 히피 문화를 경유해 지금까지도 반항과 젊음, 도전 정신을 대변하는 색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파란색 재킷과 노란색 바지를 입었다.
이러한 ‘베르테르 스타일’은 당대에 엄청나게 유행했다고 한다. (영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한 장면.)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 야수(왕자)는 벨과의 무도회를 앞두고 파란색 재킷을 고른다.
「라라 랜드」의 주인공 미아는 오디션에 떨어진 뒤에 슬픈 마음을 다잡고, 친구들과 기분 전환에 나선다.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색깔은 성별을 지니고 있을까? 당연히 아닐 터다. (사진은 윤정미 작가의 작품이다.)
『파랑의 역사』를 펴낸 계기는, 물론 사심 가득히 파랑을 좋아했기 때문이다.(그리고 띠지에 적혀 있듯이 이것은 “파랑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사실은, 색채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으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언제나 인간이었다는 점이었다. 즉 우리가 사랑하고 누리는 색깔들은, 전부 하나의 사회 현상이자 더 나아가서는 인간 그 자체다. 이제는 늘 사랑해 온 파랑뿐 아니라, 그 어떤 색도 허투루 보아 넘길 수 없을 것 같다. 색채야말로 인간의 삶과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세상에 못난 색깔은 없다는 말이 아닐까? 다만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건 오로지 인간일 뿐!
민음사 편집부 유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