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의 역습』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스스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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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언제쯤이었을까요, 회사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무인 주문대가 들어왔습니다. 터치스크린 키오스크에서 주문, 결제, 해×밀 장난감 선택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주문대에서도 현금으로 계산할 것이 아니면 키오스크에서 주문해 달라고 안내하더군요. 처음에는 조금 서툴렀지만 익숙해지니 꽤 편리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에는 아무래도 키오스크 앞의 줄이 길어집니다.

 

◆ 상영 시작 15분 전까지 취소가 가능한 영화 예매 앱은 제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 중 하나입니다. 어떤 때는 집부터 나서고 영화관에 가면서 표를 예매하기도 해요. 선택의 자유란 사람을 붙잡아 두는 데가 있습니다. 취소가 자유롭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자리가 나지는 않을까 계속 앱을 들락거리게 됐어요.(제가 좀 미련이 많습니다.)

 

◆ 요즘은 여행 준비하면서 항공권, 호텔 비교 검색 사이트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좌석, 같은 방이라도 몇 만 원에서 때로는 몇 십만 원까지도 차이가 나니 최저가를 찾아 눈에 불을 켜게 됩니다. 공항에 가면 탑승 수속을 담당하는 키오스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수하물 위탁까지 승객이 직접 처리하는 키오스크도 등장했습니다.

 


 

『그림자 노동의 역습』은 우리가 대가를 받지 않고 행하는 ‘숨은’ 일들을 조명하는 책입니다. 35년 전 오스트리아 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처음 ‘그림자 노동’의 개념을 제시했을 때 생각한 대표적인 사례는 가사 노동과 통근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임금 노동을 뒷받침한 덕분에 사회는 산업화의 길을 밟을 수 있었지만, 이 일들은 보수를 받는 ‘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림자 속에 존재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 크레이그 램버트는 기술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그림자 노동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말합니다. 신제품이 출시되거나 이전에 없던 서비스가 등장할 때, 전에는 기업에서 제공하던 일들이 알게 모르게 소비자에게 넘어갑니다. 인터넷을 통해 전문 지식과 정보가 쉽게 검색되고 공유되면서 시간과 수고를 들이면 직접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집에서든 일터에서든,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점점 많은 그림자 노동이 나에게 맡겨집니다.

 

물론 그림자 노동으로 얻는 이득도 있습니다. 주식 거래 수수료를 아낄 수도 있고, 뉴발란스 574 운동화를 원하는 모양으로 디자인할 수도 있습니다.(2013년 미국의 한 쇼핑몰에서 색상, 소재, 끈, 로고 등 이 운동화의 모든 옵션을 고객이 직접 고를 수 있는 무인 판매대를 내놓았습니다. 각각의 요소를 모두 조합해 나올 수 있는 운동화 가짓수가 무려 4경 8000조 개나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을 직접 해내기에 하루 24시간은 한참 부족합니다. 《이코노미스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두 가지 일을 스스로 해내는 것은 자유와 해방감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일에 일일이 신경 써야 한다면 기계의 노예가 된 느낌이 들 것이다.

이 책은 온갖 종류의 ‘퍼스널’ 서비스가 ‘셀프’ 서비스로 대체되는 순간을,

그래서 우리가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순간을 세밀하게 조명한다.”

 

 

그러니까 그림자 노동의 이점을 누리는 대신 시간을 내놓는 셈입니다. 돈을 사려고 시간을 파는 것이고, 편리해지기 위해 공짜 노동을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유가 없어집니다. 사소한 잡일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느라 늘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고, 길어지는 ‘투 두 리스트’ 혹은 ‘버킷 리스트’를 보며 자책감이 듭니다. 어쩌면 현대인은 거대한 셀프서비스의 함정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민음사 편집부 김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