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_표1

 

 

 

“작정하고 사람 우습게 만들려는 게 아니면 이게 뭔가. 그런 생각이 들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그곳에서 내가 종일 한 일은 그런 충동과 분노를 가만히 잠재우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은 언제나 시도 때도 없이 살아났고 어쨌든 나는 모른 척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결국엔 멀찌감치 떨어져서 우스워지는 나 자신을 남의 일처럼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퇴근 후에는 습관적으로 어비를 찾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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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앞에 앉은 어비는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고, 질문을 하면 겨우 더듬더듬 몇 마디를 했는데 말을 이어 나가고 사람들을 계속 붙잡아 두는 재능 같은 건 도무지 생겨나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방송을 했는데 사람을 끌어들일 만한 외모도, 몸매도, 하다못해 재치와 유머 같은 것도 없어서 드물게 찾아온 사람도 다 놓쳐 버리기 일쑤였다. 이 사람 뭐죠? 이거 무슨 방송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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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상무의 아이를 데리러 초등학교에 간 적이 있다. 외근을 나왔는데 아이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거였다. 어쨌든 집까지만 좀 데려다 달라는 부탁이었다.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좁고 가파른 골목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했다. 운동장에 깔린 모래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연기처럼 어른거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곧장 교무실로 가서 아이의 이름과 학년을 말하고 상황을 설명했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상무와는 연락이 닿지 않고 한참 만에 통화가 됐는데 그는 오히려 내게 화를 냈다. 거기가 아니라는 거였다. 분명 제대로 알려줬는데 왜 일을 이렇게 만드느냐며 이럴 거면 처음부터 하지를 말지 어쩌고저쩌고 하는 비난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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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저녁 방송을 켰을 때였다. 어비는 길 위에 있었다. 휴대폰으로 방송을 켜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어디 가냐, 뭐 하러 가냐, 묻는데도 어비는 그냥 앞으로, 앞으로만 가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비는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불을 켜고 작업 중인 공사 현장을 지났다. 한참 만에 멈춰 선 곳은 작은 버스 정류장이었다.”


 

어비의 발길이 멈춘 곳은 어디일까. 치욕을 견디며 일자리를 전전하는 ‘나’의 손길이 자꾸만 어비의 방송으로 향하는 까닭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도서 물류창고였다. 비정규직 단기 근로가 대부분 그렇듯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그만뒀고 이어 다른 한 사람도 직장을 옮겼다. 그리고 또 다른 일자리에서 마주치길 한 차례. ‘나’는 우연히 발견한 어비의 방송을 모종의 관심과 의심, 질투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청취한다.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방송이라고 하면서 별풍선을, 아니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자신이 제대로 된 일을 하기 위해 감내한 모욕과 수치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비』는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하고 임시적인 일자리에 대한 김혜진 작가의 관심이 총망라된 작품집이다. 표제작 「어비」에서는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언젠가 정규직 일자리를 얻게 되길 바라는 ‘나’와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는 가운데 인터넷 개인방송으로 별풍선을 벌어들이는 ‘어비’가 교차되며 우리 앞에 도래한 변화의 한 장편을 보여 준다. 20년 동안 성실하게 일하고도 무례하고 폭력적으로 해고당한 중년의 여성이 꿋꿋하게 일인시위를 하는 이야기며, 이력서에 보태려고 시민운동을 하다 ‘용역’들에게 이끌려 한밤의 산행을 피하지 못한 대학생의 이야기까지, 일자리를 둘러싼 아이러니한 풍경들이 우리를 외면하고 싶은 현실 앞에 데려다놓는다. 이로써『어비』를 읽는 우리는 세대적 문제와 계층적 문제가 종횡하는 총체적인 시선을 경험할 수 있다.

 

민음사 편집부 박혜진

김혜진
출간일 2016년 8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