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는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여성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여성인 피해자는 무참히 살해당했고, 피의자는 범행동기로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당해서”라고 말했다. 비좁은 화장실에서 흉기를 들고 피의자는 스스로에게 무슨 질문을 던졌을까. 죽일까? 살릴까? 나를 왜 무시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살까? 모두 아니다. 그 시간 피의자가 화장실 바깥 세계에 던진 유일한 의문은 아마도 “화장실에 들어온 저 사람은 내가 압도할 만한 여성인가?”였을 것이다. 그는 답을 얻고 범죄를 행했다. 희한하게도 그의 정신질환은 1시간 사이에 화장실에 들락거린 다른 남성들에게는 발병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세상은 ‘묻지 마 살인’이라고 답을 준다. 그렇게 우리의 질문은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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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의 시선집이 새로 나온다(5월 27일 출간 예정). 5월에 어울리는 제목이다. 『지금 장미를 따라』. 문정희 시인은 1969년 데뷔하여 지금까지 성실하게 시를 써 왔고, 그의 시집들은 9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문정희 시인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이 문장은 잘못되었다. 다음과 같이 수정하겠다. 문정희 시인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지금 장미를 따라』에는 시인의 지금까지 낸 13권의 시집에서 대표작만을 골라 다시 배치한, 문정희 시의 정수이자 전부다. 48년의 시간, 13권의 시집……. 그렇다고 해서 최근 불고 있는 복고 열풍에 편승하고자 함은 아니다. 긴 시간이 무색하도록 시인의 시는 현재적이고 문제적이다. 장미가 피기 좋은 5월의 어느 날, 시인의 시는 시대를 거슬러 우리에게 울음과 전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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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집의 후미를 채우는 시인의 산문 「나의 몸, 나의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곡비(哭婢)로 칭한다. 곡비는 무당의 일종으로, 유족을 대신해서 울어 주는 울음 전문가였다. 『지금 장미를 따라』는 어제의 어머니, 오늘의 여성, 내일의 우리 삶을 대신 울어 주고 있다. 한바탕 울고 나서 세상이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울음 없이 버티기 힘든 시절을 우리는 함께 나고 있으니, 그 과정에 『지금 장미를 따라』가 어떤 위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정희 시 두 편을 포스트잇 대신에 여기에 써 붙여 둔다. 이곳이 아닌 어느 곳에서는 부디 평안한 삶을 누리시길 바라며,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죽어 없어지지 않기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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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작은 부엌 노래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 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움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가

간을 맞추는 냄새

부엌에서는

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요

세상이 열린 이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소리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

촛불과 같이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의 덜미를 푸른

소름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요

수줍은 새악시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와요

우리 부엌에서는……

 

02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잣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잣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잣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 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 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사도 됐을 거야

문화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편집부 서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