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향한 의지』 윌(Will) 셰익스피어는 어째서 세계를 바꾼 의지(will)인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토머스 칼라일의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라는 오만한 선언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유산은 오늘날 현대 문명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힙합 신에 등장하는 ‘swag’와 ≪보그≫에 족히 수천 번은 언급됐을 ‘fashionable’이라는 단어,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는 물론 외래문화에 배타적인 이슬람 국가의 연극 무대에조차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작품과 언어는 깊숙이 침투해 있다. 심지어 천왕성의 위성들에도 셰익스피어가 그려 낸 인물들의 이름이 붙어 있으니 거의 범우주적 성취라고 부를 수 있을까?

 

448d8963-ebaf-4b89-93b6-f77cbd3fb94d스포츠 의류 브랜드 아디다스에서도 ‘SWAG’를 외치고 있다. 

 

이렇게 ‘위대한’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돌연 사망해 버렸다면, 혹은 그의 작품이 완전히 유실돼 버렸다면 어땠을까? 물론 바꿀 수 없는 역사를 두고 이런 가정을 한다는 건 (재미있을지언정) 굉장히 유치한 일이지만 분명 대단히 안타까운, 아니 단지 ‘안타깝다.’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엄청난 상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참혹한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모두 알다시피 셰익스피어는 나름 천수를 누렸고, 그 스스로 써낼 수 있는 만큼 작업을 완수한 후에 절필했다. 당시 유행하던 역병에 걸려 요절하지도, 객기로 결투를 벌이다가 비명횡사하지도 않았다. 마치 그는 언제 자신의 소임을 내려놓아야 할지 벌써부터 알았다는 듯이, 본인의 말년을 암시한 마술적 작품 『태풍』을 끝으로 펜을 꺾었다. 창조성의 샘을 등진 그의 펜촉은 하루 이틀 사이에 말라붙었겠지만 셰익스피어의 남은 생애는 고향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지속됐고, 그의 작품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영원성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여러모로 불안정하고 사회적 격변기였던 당시에 중요한 언론 매체이자 오락거리, 프로파간다의 도구였던 극장을 소유한 사업가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을 선보인 작가로서 셰익스피어의 목숨은 종종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다. 아무리 왕권이 강력한 시대였다지만 국민들의 여론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매우 중요한 풍향계였고, 이것은 왕이나 귀족들에게 정치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도로 빼앗기도 했다. 따라서 뉴스를 실어 나르는 텔레비전과 같았던 글로브 극장의 위상은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위력을 이용하려 했던 이들도 있었다. 바로 엘리자베스 1세를 몰아내려 시도했던 에섹스 백작 말이다. 그는 당대의 금상 엘리자베스 1세를 견제하고, 더 나아가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폐위된 왕’의 이야기를 다룬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왕족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셰익스피어가 일부러 클라이맥스(폐위 과정)를 잘라 냈던 그 작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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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 그는 자신을 폐하(Majesty)라고 부르도록 한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4대 비극’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영국 현지에서는 오히려 더 자주 상연되고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수차례 제작되었다.(가령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자주 상연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리처드 3세」라고 한다.) 우리가 사극을 보면서 역사적 사실을 일종의 반면교사로 삼듯, 즉 현재와 미래에 이정표를 제시하는 가장 밀도 있는 참고서로 활용하듯이 영국 현지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 드라마의 전형적인 예로서 다뤄지고 있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듯 『리처드 2세』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독재와 권력욕의 잔혹한 일면을 보여 주는 예시로서 우리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선사하고 있다. 영국 왕실의 적통으로서 어린 나이에 왕관을 쓴 리처드 2세는 아름다운 용모에 취해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즉 황홀한 나르시시즘에 젖은 캐릭터로서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짐은 부탁하지 않는다, 다만 명령할 뿐이다!”라고 고함치는 리처드 2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권력에 탐닉하는 한 인간의 비뚤어진 내면을 들여다본다. 평소 교훈적인 내용을 전면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걸 꺼렸던 셰익스피어이지만 『리처드 2세』는 왕정 시대의 맥락을 넘어서는 권력의 운명, 그 광기와 필멸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무리 적법한 지도자라도 그가 실정을 한다면 왕좌에서 쫓아내도 정당한 것일까? 혁명 혹은 쿠데타를 합리화할 수 있을까? 반역의 명분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권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고, 어째서 사람을 매혹시키는가? 평소 역사책을 읽는 걸 좋아했고, 수시로 왕궁을 드나들며 왕실이 지닌 위력에 이끌렸던 셰익스피어는 막대한 권력이 주는 공포와 덧없음을 동시에 간파한 듯싶다. 따라서 리처드 2세는 셰익스피어의 생각(정치 권력에 대한 입장)을 펼쳐 보이기에 매우 적확한 인물이었으리라. 자신의 왕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신이 인정한, ‘보통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권리를 지녔다고 여긴 리처드 2세는 국가 체계 위에 군림하며 사촌 헨리 볼링브로크(훗날 헨리 4세가 된다.)를 압박하고 심지어 합당한 재산까지 몰수한다. 그것은 왕이 국가 위에 군림한다는, 중세적 왕권신수설을 반영하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당시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결국 리처드 2세의 강압적인 처사는 곧 반발을 불러온다. 그가 일으킨 파문은, 왕권이 성유(聖油)와 천사들의 비호를 받던 시대가 끝나고 정치가들의 협상과 합의해 의해 이뤄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끝내 리처드 2세는 (폭군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그 힘의 반작용에 의해 몰락하고 만다. 태어나면서부터 왕이었던 그는 사촌에게 왕위와 왕관을 넘기면서, 급기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때 셰익스피어는 (매우 놀라운 솜씨로) 우리에게 두 가지 문제를 던져 준다. 하나는 앞서 기술한 ‘권력’의 문제고, 나머지는 인간 실존에 관한 도발적인 질문(사회적 지위, 그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인간 존재는 ‘무엇이’ 되는가?)이다. 리처드 2세의 권력은 혈통의 권위를 의문시하는 정치에 의해 무너지고, 그의 왕홀(王笏)은 필멸하는 인간 존재의 벌거벗은 토대 위에서 완전히 산산조각 난다. 셰익스피어가 완벽한 운문으로 구사한 리처드 2세의 기나긴 독백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지구상에 등장했던 독재자들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셰익스피어는 독재란 권력이 준 환각에 불과하며 독재자 또한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따라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파괴할 수 없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며 경고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왕을 비롯한 모든 권력자들에겐 늘 두려운 작품이었다.(측근의 손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마거릿 대처는 종종 리처드 2세에 비유되곤 했다.) 반면 혁명을 도모하는 이들에겐 반드시 간직해야 할 일종의 성명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영국의 전성기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도 반역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30여 년 동안 영국과 유럽을 쥐락펴락하며 독재를 방불케 하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온 엘리자베스 1세는 총애하던 에섹스 백작과 그의 측근 귀족들로부터 드센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대의명분이 부족했던 에섹스 백작은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를 소환해 냈고, 거사를 치르기 전에 이 작품을 감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자아도취에 빠진 폭군이다, 리처드 2세와 같은 독재자다, 그의 폐위는 정당하다!’라면서 말이다. 사실상 『리처드 2세』는 그날에야 처음으로 완전하게 공연됐다. 수백 년 전의 이야기라고 해도, 어쨌든 ‘왕의 폐위 장면’은 왕실의 검열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리처드 2세가 왕관을 내동댕이치는 광경은 엘리자베스 1세에겐 굉장히 불편한 부분이었고, 에섹스 백작 무리에게는 틀림없이 가장 흥분되는 대목이었을 터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했고, 에섹스 백작은 거대한 영광을 누린 헨리 볼링브로크와 달린 참수되고 만다. 이때 셰익스피어와 글로브 극장의 배우들도 목이 날아갈 뻔하지만 “에섹스 백작이 그저 웃돈을 줘서 『리처드 2세』를 공연했을 뿐”이라는 이유가 참작되어 목숨을 부지한다. 만약 그 순간, 셰익스피어의 숨통이 끊어졌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걸작들을 만나 보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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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로 분한 벤 위쇼. 

그는 리처드 2세의 “나도, 혹은 나라는 그 어떤 사람도/

그가 아무것도 아닌 자의 역할을 편히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리라.”

라는 유명한 대사를 절절히 읊었다. 

 

셰익스피어는 14세기의 왕 리처드 2세를 되살려 내어 16세기의 군주 엘리자베스 1세를 긴장하게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지난 400여 년 동안 자기 손아귀에 권력을 쥐려 했던 모든 이들과 거기에 맞선 사람들에게 묘한 동요를 불러일으켜 왔다.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빌려 와 자신만의 스타일로 유려하게 가공해 냈으며, 더불어 특정한 개인뿐 아니라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신묘한 재능으로 보편성을 불어넣었다. 에일 맥주와 거친 호밀빵을 먹어 치우며 연극을 구경하던 16세기 글로브 극장의 관중들은 물론, 오늘날 대학로 극장에서 학교 과제 때문이든 데이트를 위해서든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마주하고 있는 필부필부에 이르기까지 그는 인생에 꼭 필요한 질문과 생각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야말로 벤 존슨이 선언했듯 “셰익스피어는 한 시대가 아니라 영원히 남을 작가”가 된 것이다. 『맥베스』에 등장하는 세 마녀들이 부리는 놀라운 주술만큼이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여전히 경이롭고 앞으로도 그러할 터다. 더불어 그가 던진 삶의 문제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일종의 신비로 남아 있으며, 또 어떠한 수를 써도 명쾌히 해명할 수 없는 인간 존재 본연의 수수께끼로서 역사에 길이 간직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이 지닌 영원불멸성, 즉 생명력의 진정한 원천일지도 모른다.

 

 

민음사 편집부 유상훈

연령 15~70세 | 출간일 2016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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