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민주주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총선 투표’가 끝났다. 지난 다른 선거에 비해 높은 투표율을 보이며 새로운 변화를 불러왔다. 역시 민주 사회에서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확실한 방법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투표권’을 충실히 행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느닷없이 ‘젊은이를 단념시켜라.’라는 구호를 들으면 일종의 위화감, 아니 불쾌감이 들 터다. 실제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자신의 데뷔작 『희망 난민』에서 그러한 주장을, 매우 천연덕스럽게 펼쳤다. 당최 무슨 생각으로 젊은이들에게 ‘단념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언급한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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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책없게도 인터뷰 자리에서, 후루이치 노리토시 선생에게 친필 서명을 요청했다. 처음 쓰는 한글을 제법 잘 적었다.

 

언젠가 한 일간지가 주선한 자리를 빌려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와 세 시간에 걸쳐 긴 대화를 나눴다. 그의 생각은 일본인에게는 물론,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도 발칙하고 때로는 위험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의 주장, 그 행간 사이사이에 숨은 이야기를 캐내다 보니 내 선입관과는 전혀 다른 의도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이미 책에서도 수차례 강조했다시피 『희망 난민』을 “젊은이들이여, 단념하라!”가 아닌 “젊은이들을 단념시켜라.”라는 논지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희망을 단념한다는 건 꿈을 성취한다는 뜻이고, 사회가 나서서 젊은이의 희망을 지지해 줘야 한다는 건 결코 고약한 주장이 아니다. 덧붙여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빈곤과 인정 투쟁의 틈바구니에서 안정적인 삶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데, 저성장과 기대 감소의 시대가 돼 버린 오늘날엔 성공과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는 구조 자체가 와해됐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인구 구성도 급격한 고령화 탓에 젊은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국이 되고 있다면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 경제 고도성장기와 베이비 붐 세대가 활동하던 시대의 기대치를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대로 강요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일 터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꿈을 꾸고 희망을 좇으며 더 나은 내일을 찾아 헤매는 만큼, 사회(모든 세대 구성원) 또한 젊은이들을 단념, 아니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결국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말하고 싶었던 건 단념이었다기보다, 현실과 희망의 격차가 줄어들 때야말로 꿈을 꿀 수 있게 된다는 역설이었다. 덧없는 희망 고문은 기대와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단지 포기하는 방법만을 가르쳐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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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길거리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피스 보트’ 광고지. 『희망 난민』에는 이곳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이런저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이 책은 기묘하다. 오죽하면 (여전히 희망을 믿는) 혼다 유키 교수가 주먹을 부르쥐고 장문의 「해설 혹은 반론」을 써냈겠는가. 하지만 이런 기묘함 때문에 한 번쯤(혹은 그 이상?) 읽어 볼 만하다. 『희망 난민』은 우리 시대의 젊은이와 여행, 인정 투쟁과 빈곤 문제, 사회 운동과 공동체 참여 등 다양한 주제들을 송두리째 살피고, 쪼개고, 들여다본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NGO 단체 ‘피스 보트’에 현대 ‘젊은이 문제’의 적나라한 단면이 담겨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다른 걸 다 떠나, 한 시대를 가늠하게 하는 ‘시준 화석’으로서 『희망 난민』을 간직해도 충분히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이것 하나만큼은 더 강조하고 싶다. 『희망 난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념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한국어판 262쪽) 쓰인 책이라는 사실을.

 민음사 편집부 유상훈

연령 15~70세 | 출간일 2016년 3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