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시대의 시인』 김우창과 윤동주

윤동주 하면 도시샤대학에 유학 가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순결한 민족의 시인이라는 상이 오래되었다. 그런데 ‘김우창 전집’을 편집하면서 첫째 권 『궁핍한 시대의 시인』에 실린 윤동주론 「시대와 내면적 인간」을 읽고 이해를 새롭게 하게 되었다.

이 글은 윤동주가 한 점 의심 없었던 저항 시인이라기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내면적 인간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밖에서 부과된 도덕률이 아니라 안으로 계속한 성찰에서 비롯한 것으로, 오히려 자신이 나아지기 위해서라도 세계가 나아지길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하 어두운 시대는 내면적 인간에게 억압의 무게를 더해 갔다. 이러한 갈등이 드러나는 시 중 하나가 「또 다른 고향」이다.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지조 높은 개”가 그야말로 우직한 동물같이 “어둠을 짖는”다면,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혼”을 구하는 ‘나’는 쫓기듯이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떠난다. 김우창은 이 ‘극히 애매한 시’를 해석하면서 윤동주의 전기적 사정을 짚는데, 이 시를 쓸 즈음 윤동주는 고향인 북간도 용정에 갔다가 서울의 학교로 돌아왔고, 나아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고 한다. 그는 ‘안으로의 깊이가 밖으로의 높이와 넓이를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았기에 “부끄러운 이름”을 언덕에 묻어 가면서까지(「별 헤는 밤」) 떠났다. 그리고 적극적인 행동이 있기 전에, 귀향하지 못한 채 이른 죽음을 맞았다.

여기에서 김우창의 이력을 생각해 본다. 전집 편집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할 때 선생님은 간혹 미국 유학 시절 이야기를 하셨다. 오하이오에 막 도착한 1959년 그곳에 한국인은 대여섯 집밖에 없었고, 한국 사람이 왔다고 집집마다 선생님을 불러다가 밥을 먹였다고 한다. 연보를 보면 선생님이 윤동주론을 쓴 것은 1976년, 하버드에서 박사까지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무렵이었다. 선생님은 글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짧은 생애를 산 윤동주의 시에서 “어떤 미완성감과 침묵”을 본 선생님 자신은 군사 독재하의 고향에서 ‘안과 밖의 교섭’을 이루겠다고 다짐한 것이 아닌가?

전 19권으로 기획된 김우창 전집은 1960년대에서 지금까지 50년 동안 쓰인 글을 모두 모았다. 근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의 한계 속에서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간 김우창의 이력은 한국인이 인문학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고, 이번 전집은 한국 인문학의 영광과 그늘까지 직시하기 위한 바탕이 될 것이다. 나는 전집의 독자가 누가 될지를 생각하면 외국에 가 있거나 이제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는 친구들이 떠오른다. 항상 ‘청춘’, ‘청년’이라는 식으로 불리기만 해 온 우리 세대는 윤동주, 김우창을 어떻게 읽고, 무엇을 다짐할 수 있을까?

민음사 편집부 신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