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달과 6펜스』일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청소년 추천 도서 목록에 어김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책을 읽은 사람도 안 읽은 사람도 “달=이상, 예술 vs 6펜스=현실, 물질”이란 공식만은 외울 것이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고뇌하는 한 젊은이가 세상에 눈떠 가는 성장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자전 소설로 역시 교양 도서 목록에 꼭꼭 들어가 있는 유명한 작품이다. 『면도날』은 앞서 말한 두 작품과 함께 ‘서머싯 몸의 3대 장편소설’ 에 속한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적이 없어 두 작품의 유명세에 비하면 많은 이들에게 낯선 작품이다. 두 차례나 영화화 되었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개봉되지 않았다.
『면도날』은 1930년대 유럽, 그 풍요와 야망의 시대를 배경으로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청년 래리의 구도적 여정을 그린다. 래리는 자아를 찾아 프랑스의 탄광과 수도원, 독일의 농장, 스페인과 이탈리아와 인도까지 떠돈다. 이 작품은 날카로운 면도날을 넘어서는 것처럼 고되고 험난한 구도의 길을 선택한 한 젊은이를 통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서머싯 몸은 ‘구원’이라는 다소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보통 사람들의 삶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그 특유의 명쾌하고 간결한 문체와 유머를 잃지 않아, ‘소설은 재미를 위한 것’이라는 자신의 문학관을 이 작품에서도 성공적으로 보여 준다.
이 책의 독특함 중 하나는 작가 자신이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화자이자 작품 속 조연인 ‘서머싯 몸’은 때론 인물들의 가까운 이웃으로, 때론 몇 년 동안 연락이 닿지 않는 옛 친구로 그들의 삶을 전해 준다. 소설 속 서머싯 몸은 명백히 가공된 인물이지만 작가라는 직업과 이름이 똑같을 뿐 아니라, 취미, 버릇, 성격 등 실제 자신을 모델로 실감나는 이야기를 창조한다. 또한 이러한 참신한 설정을 활용해, 작가는 이야기 밖에서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실제 생활에서 서머싯 몸은 말더듬이에, 대인기피증 환자, 커밍아웃을 두려워한 동성애자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아침에 눈뜰 때마다 오늘도 죽지 않았다고 신경질을 부리면서도 아흔한 살까지 삶을 누리다 간, 까다로운 괴짜 같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말년의 그는 여전히 독설을 서슴치 않는 냉소적인 개인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이기심에 관대하고 아집을 포용하는 어른의 태도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머싯 몸은 『면도날』을 통해, 방황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열성적인 후원자는 아닐지라도,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따뜻한 온기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 자투리 이야기
이 소설이 출간된 직후인 1946년 흑백 영화로 제작된 「면도날」에는 당대의 톱스타 타이론 파워가 출연했는데, 그의 수려한 외모 탓에 오히려 주제 전달에 실패했다는 평이 있다. 1984년에 상영한 리메이크 영화 「면도칼의 모서리」의 각본과 주연을 맡은 빌 머레이는 이 작품의 제작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1980년대 최고 흥행작 중 하나인 「고스트 버스터즈」에 출연하기로 계약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정작 「면도칼의 모서리」의 흥행 결과는 좋지 않았다고 하니, 우리는 두 번씩이나 『면도날』을 스크린에서 볼 기회를 놓친 셈이다.

[민음사 편집부 윤인영]

서머싯 몸 | 옮김 안진환
출간일 2009년 6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