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뒤로

오늘날에도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되는 조선의 대학자이다. 1536년(중종 31년) 강릉 외가의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이미 글을 읽었으며 예닐곱 무렵 글을 지었을 만큼 일찍부터 총명함을 드러냈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급제했지만 어머니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큰 상실감에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23세에 퇴계 이황과 학문을 논했으며, 29세에 대과 장원 급제를 비롯해 이후 아홉 번이나 장원을 차지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다. 입신 후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소신을 피력하고 홍문관 교리, 춘추관 편수관,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한 후 41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있으면서 이듬해 황해도 해주에서 『격몽요결』을 지었다. 46세에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47세에 이조·형조·병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건의하는 등 기울어 가는 나라를 위해 힘썼다. 1584년(선조 17년) 49세를 일기로 서울 자택에서 별세한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자운서원이 세워졌다.
널리 알려진 저서로 『동호문답(東湖問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소학집주(小學集註)』, 『성리학설(性理學說)』, 『경연일기(經筵日記)』, 『학교모범(學校模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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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 옮김 김원중
출간일 2015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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